담양 국씨 대종회 게시판

제목   담양신문 기획특집 담양성씨 인물사 3호
이름 국승구 날짜 2012-04-20 [20:55] 조회 12481 추천 4594

담양신문 기획특집 담양성씨 인물사 3호 기사내용입니다.

 정당문학 국건(政堂文學 鞠橏)-1254~?, 고종41년(1254)~충숙왕 연간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는 이런 어지러운 정국에서 국정의 한축을 담당하는 정당문학으로서 나라의 중심을 굳건히 하는데 헌신했으며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제23대 고종 41년(1254)문하평장사 국호(鞠虎)의 아들이다. 조부 국성윤(鞠成允)은 충청안렴사를 지냈다. 약관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의 여러 부서에서 위국위민의 치적을 쌓아 드디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의 자리에 올랐다. 정당문학은 종2품의 중서문화성 소속의 재신으로 국정을 논의하는 직책이다. 중서문화성의 장인 문하시중은 수상이다.

국건이 활동한 시기는 제26대 충선왕,제27대 충숙왕 재위 기간이었다.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인 충선왕의 즉위는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을 더욱 높여 주었다. 심지어 왕이 재위 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기거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고려조정의 불안정은 한층 가중되었고 다른 한편에선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끊이지않았다.

원 황실에서 지위와 원 조정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원나라 체류를 고집한 충선왕은 왕위를 아예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한 채 연경의 저택에 사비를 들여 학술 연구소 만권당(萬卷堂)을 세웠다. 그곳에서 요수, 염복, 조맹부, 장양호, 원명선, 우집등 당대의 중국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연구를 뒷받침했으며 고려에서 이제현을 불러들여 그들과 교류하게하여 고려의 학문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충선왕은 1316년(충숙왕 4년)에는 원 조정이 왕위에 오르기전에 부여했던 심왕의 자리를 왕고에게 물려주고는 토번의 승려, 즉 티베트의 라마불교 승려를 불러 계(戒:승려가 지켜야 할 행동규범)를 받기도했다. 충선왕은 이처럼 원나라의 무종, 인종대에 걸쳐 원 황실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권력을 동시에 누렸다. 하지만 원나라의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자 별안간 입지가 약화되어 마침내는 모략을 받아 토번 지역으로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다. 얼마 후 풀려나 중국 연경에서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또한 충숙왕의 경우도 고려왕의 자리를 넘보던 심양왕 왕고의 무고로 5년 동안 원에 억류되기까지 했다.

이렇듯 왕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원나라는 전국 요소요소에 다루하치라는 일종의 고문관을 두고 고려 내정에 깊숙이 간섭했다.
국건은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는 이런 어지러운 정국에서 국정의 한축을 담당하는 정당문학으로서 나라의 중심을 굳건히 하는데 헌신했으며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묘소는 실전되었으며 현재는 담양 학동에 단비를 세워 시향을 드리고 있다. 2007년 10월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 대전에 배향됐다.

■ 대제학 국담(大提學 鞠譚)-1275~?, 충렬왕 원년~충숙왕연간

다난한 정국 속에서 조정의 중신들에게 경전을 강의하며 왕을 보좌했다. 문치를 도우며 문예를 진흥시켜 이를 치국과 경세의 근본을 삼게했다. 

제25대 충렬왕 원년(1275)에 정당문학 국건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국호는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찬성사 충순공 민종유의 사위다.
국담은 일찍부터 총명 단아하고 기국(其局)이 컸다한다.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렀다. 보문각은 경연(經筵)과 장서를 맡아 보던 관청으로 조선 조 집현전의 전신이다. 
국담이 활동한 시대는 제27대 충숙왕의 재위 기간(1314~1330, 복위 1332~1339)으로 추정된다.

충숙왕은 부친 충선왕의 즉위 전부터 줄곧 원나라에 머물렀다. 그런데 충선왕은 1313년(충선왕5년) 갑작스레 왕위를 넘겨주는 바람에 충숙왕은 20세때 고려 실정을 제대로 모른 채 왕위에 올랐다. 충숙왕은 사촌인 심왕 왕고의 무고로 5년간 연경에 억류되었다. 그런가하면 아들 충혜왕에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다시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복위되는 등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수모를 겪어야 했다.

연경에 억류되었던 충숙왕은 결국은 원 조정과 접촉하여 자신을 무고한 유청신과 오잠등의 말이 거짓임을 확인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왕고가 심왕 직에 있기 때문에 고려국의 왕을 겸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 원 조정의 수긍을 받아냈다. 이일로 입지가 강화된 충숙왕은 귀국뒤 왕고의 도당인 조식, 김온, 전굉등을 귀양보냈다. 실추될 대로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몸이 약해져 충숙왕 17년(1330)2월에 세자 정(禎)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이어 그해 7월 원나라에 들어가 머물렀다. 하지만 아들 충혜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음탕한 짓을 일삼다가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1332년에 다시 복위했다. 복위한 충숙왕은 원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민상정과 조염위를 파견하여 정승 윤석을 비롯한 손기, 김지영, 배전, 오자군, 강서 등 수십명에 대하여 왕을 잘못 받든 죄를 물어 사직시키고 유배시켰다. 

그리고 몽골 여인 경화공주를 데리고 1333년 3월에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귀국 후 원나라가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는 세공을 삭감케 하고 공녀와 환관의 징발 불가를 청원하는등 몇가지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이전부터 나타나던 대인기피증이 심해져 신하들을 멀리하고 정사를 돌보지않았다. 충숙왕은 복위 8년만인 1339년 3월에 지병이 악화되어 4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국담은 이렇게 다난한 정국 속에서 조정의 중신들에게 경전을 강의하며 왕을 보좌했다. 문치를 도우며 문예를 진흥시켜 이를 치국과 경세의 근본을 삼게했다. 
배위는 민종유의 딸 여흥민씨이며 첫째아들 양(樑)은 병부상서를, 둘째 아들 파(播)는 호부상서와 형부상서를 지냈다.
묘소는 실전되었으며 현재는 담양 학동에 단비를 세워시향을 드리고있다. 파주시 고려통일 대전에 배향됐다. 

■ 병부상서 국량(兵部尙書 鞠樑)-1298~ ?, 충렬왕 24년~충혜왕 연간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호걸스러웠으며 언변이 탁월, 마치 청산유수 같았다. 일찍이 세 살 아래 의 아우 국파와 함께 과거에 합격하여 '쌍벽연방(雙壁蓮榜)'의 소리를 들었다. 승진을 거듭하여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고 국파도 호부상서와 형부상서를 역임하는 등 형제가 모두 현달(顯達;입신 출세했다는 뜻)했다. 

제25대 충렬왕 24년(1298)에 보문각 대제학 국담과 찬성사 충순공 민종유의 딸인 여흥민씨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부상서와 형부상서를 지낸 국파(鞠播)가 아우다. 이는 대동기문에 기록되어있다. 조부는 정당문학 국건, 증조는 평장사 국호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호걸스러웠으며 언변이 탁월, 마치 청산유수 같았다. 일찍이 세 살 아래의 아우 국파와 함께 과거에 합격하여 󰡐쌍벽연방(雙壁蓮榜)󰡑이라는 말을 들었다. 국량은 출사 후 승진을 거듭하여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고 국파도 호부상서와 형부상서를 역임하는 등 형제가 모두 현달(顯達 : 입신 출세했다는 뜻)했다. 

충혜왕 3년(1342) 6월에 왕을 보필한 공으로 2등 공신에 녹훈됐다. 국량과 더불어 2등공신이 된 사람은 김승택, 박인수, 안자유, 김경(金, 鏡), 전윤장, 손원대, 이광원, 김장, 진교화, 승신, 이헌, 손습, 왕석, 이충, 이원용, 이광계, 김경(金卿), 홍매노등이다. 
한편 이때 1등공신에 녹훈된 이는 윤석, 채하중, 김석견, 이능간, 홍빈, 김영돈, 임자송, 김인윤, 김윤, 이제현, 이조년, 한종유, 김영후, 이몽가, 이운, 윤신계, 이엄, 윤환, 박청, 강윤충, 안천길, 노영서, 한의신, 배전, 최유, 황석기, 손수경, 윤원우, 김첨수, 김선장, 남궁신, 임성등이다. 

아들 유는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탐라와 곡주의 병난을 진압하는데 부원수로서 큰 공을 세워 호부상서 겸 판의금에 올랐고 뒷날 불사이군의 충정에 빛나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다. 묘소는 실전되어 담양 학동에 단비를 세우고 향사를 올리고있다. 역시 파주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 

■ 형부상서 국파(刑部尙書 鞠播)-1301~ ?, 충렬왕 27년~ 충혜왕 연간

원의 간섭과 정쟁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호부상서와 형부상서를 역임하면서 형인 병부상서 국량과 함께 국정을 바로 잡기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제25대 충렬왕 27년(1301)에 보문각 대제학 국담과 찬성사 충순공 민종유의 딸인 여흥민씨의 둘째다. 병부상서 국량이 형이다. 조부 국건은 정당문학을, 증조 국호는 평장사를 지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려 관직을 거쳐 호부상서에 오르고 그 뒤에 형부상서가되었다. 외숙이 되는 문순공 민적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있다. 민적은 영특했으며 눈썹이 그림과 같고 풍채가 수려하여 충렬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민적은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서 4년 동안있다가 뒤에 나주 목사가되었다.

충선왕이 복위하여 전의 부령을 삼았고 평양윤으로 재직등 파직되어 또 4년을 한가히 보냈다. 충숙왕이 즉위하여 선부전서 보문각 제학에 임명되고 대사헌 재직 중 원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왔다. 충혜왕이 즉위한 뒤에는 밀직사사 진현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에 임명했다.
국파가 민적을 따라 여러 관직을 거듭한 끝에 형부상서에 등용되었다는 기록에 비추어 32세 연상의 외숙이 부친처럼 많이 도와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숙왕은 즉위한 이래 사촌인 심왕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왕고 일파의 무고로 충숙왕은 원나라에 5년간이나 억류되었다. 1325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심양왕에게 선위할 계획을 세웠으나 한종유등의 강력한 반대로 이 생각을 거두었다. 

그러나 눈과 귀가 멀어 정사를 제대로 못 본다는 무고가 계속되자 정치에 염증을 느껴 1330년 세자 정에게 선위하고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즉위한 충혜왕이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자 1332년에 복위하였다. 충숙왕은 원나라의 무리한 세공을 삭감하게 하고 공녀와 환관의 선발 등을 중지토록 청원하여 자못 업적을 이루었으나 지나친 연회와 사냥으로 정사를 소홀히 했다.

국파는 이렇게 원의 간섭과 정쟁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호부상서와 형부상서를 역임하면서 형인 병부상서 국량과 함께 국정을 바로 잡기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국파, 국량 형제의 이러한 노력에 대해서는 대동기문에 기록되어있다. 묘소는 실전되어 현재 관향인 담양 학동에 단비를 모시고 시향을 드리고 있다.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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