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국씨 대종회 게시판

제목   담양신문 기획특집 담양성씨 인물사 4호
이름 국승구 날짜 2012-04-20 [20:57] 조회 12824 추천 4659

담양신문 기획특집 담양성씨 제4호 기사내용입니다.


담양성씨 인물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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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날짜 : 2012. 04.05. 17:08

 
호부상서 겸 판의 금 국유(鞠襦) 영정.이 대형 영정은 2009년 5월 고려 통일 대전 충신각에 모셔졌다.  
 
■ 호부상서 국유(戶部尙書 鞠襦)-1324~1392, 충숙왕 11년 ~ 조선 태조 1년

국유는 왕에게 척불(斥佛.불교를 배척하자는 뜻)상소를 올렸는데 이로 인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절해고도로 유배되어 몇 해 동안 고생을 했다.

국유의 호는 복애(伏崖)다. 제27대 충숙왕 11년(1324)에 병부상서 국량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부상서 국파가 숙부이며 조부는 보문각 대제학 국담이다. 조모는 당대에 문명을 떨친 찬성사 충순공 민종유의 딸인 여흥민씨다. 담양국씨의 시조 추성군 국주의 9세손이다. 국유 스스로 두문동(杜門洞) 72현 가운데 한 사람이며 역시 72현에 속하는 전농시 부정(典農寺 副正) 조유가 매제된다.

국유는 당대의 거유 익재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제현이 일찍이 이르기를 󰡒이 아이는 그릇이 크고 넓어 장차 크게 대성할 것이 분명하며 굳세고 곧으니 난리를 당하여도 결코 변치않을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성장 후 조정에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당시 이색, 정몽주, 전녹생등 명망 있는 인물들과 널리 친교를 맺었다.
공민왕 18년(1369)에는 탐라와 곡주에서 일어난 병란을 도통사 최영장군의 부통사로서 출전하여 이를 진압했는데 그 공로로 호부상서 겸 판의금이 되었다. 공민왕은 승려인 신돈을 왕의 스승으로 삼아 국정혁신을 추진했는데 그 폐단이 매우 컸다. 이에 따라 국유는 왕에게 척불(斥佛.불교를 배척하자는 뜻)상소를 올렸는데 이로 인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절해고도로 유배되어 몇 해 동안 고생을 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국유에게 예조판서를 내리며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 君)의뜻을 굳히고 무송도시를 읊고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다 조선 왕조의 관리들이 지른 불을 피하지않고 끝내 순절했다. 오늘날 두문동 서원에 모셔진 16명의 순절신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타계한 해는 조선 태조1년(1392)으로 고려가 멸망한 바로 그 해다. 향년 69세 였다. 다음은 무송도시(撫松圖詩)다.

이 땅이 송도라 나는 솔을 좋아하노라
이제 높은 벼슬인들 가소롭도다
누가 도상의 눈물을 씻어 줄고
눈앞에 국화가 가득하니 마음 둘 곳 없어라
또 다음과 같은 시도 남겼다.
한 평생 자신을 잊고 산 개자추의 한이요
목숨 바쳐 천추에 이름남기니 왕촉의 원통함일세
그 충성심으로 말하면 일월같이 빛나고
그 의로움은 산악같이 분명하고나

국유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서 이르러서도 여러 왕들이 진무제를 올렸으며 그 후 담양의 구산사, 장성의 경현사, 고산의 반곡사 등 전국8개소의 사당에 배향되어 향사되고 있다. 담양학동에 단비가 모셔져 문중에서 별도로 향사하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
 
복애(伏崖)공 무송도시비(撫松圖詩碑) 무송도시는 복애공이 조선태조로부터 예조판서 제의를 받고 불응하면서 지은 시다. 그뒤두문동에서 소신 순절하였다. 2009년12월10일 고려 통일 대전 석난간에 세워졌다. 비 위의 해태는 사악함을 물리치고 화재를 막는 상징성이 있는 영적 동물이다. 대종회장 31세 창근씨가 헌성했다.  
 


■ 충절신 국무(忠節臣 鞠珷)- (? ~ ?, 고려말 ~ 조선 초)

국무는 향리인 담양에서 널리 인재를 모아 사서삼경과 성리학을 전파함으로써 그 문하에서 호남의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국무는 비록 백두였음에도 당대의 고명한 유현으로 존경을 받았다. 국무는 부친 순절 후 일생동안 안방에 부친의 위패를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호곡했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지극한 효성에 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국무의 고려에 대한 충성심과 절개는 평생 변함이 없었고 당대 유현으로 또는 충절인으로서의 그의 명망은 조야에 널리 알려졌으며 충절의 귀감이라 불렀다.
두문동 순절신의 한 사람인 호부상서 겸 판의금 국유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가 병부상서 국량이며 담양 국씨 의 시조 추성군 국주의 10세손이다.

아버지 국유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예조판서를 내려 여러 번 불렀으나 이에 끝까지 불복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불에 타 순절했다. 두문동에 은거하는 고려 유신들을 밖으로 나오도록하기 위해 주변에 불을 질렀는데 국유는 끝까지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순절 당시 국유에게는 국무외에 국성,국황등 모두 세아들이 있었다. 이들 3형제는 국유 순절 후 장남 국무의 주창에 따라 가족들을 이끌고 개경을 떠나 담양으로 내려와 천변리에 정착했다.

정종2년(1400)에 조정에서 고려의 충신 자제들에 대한 유화책으로 녹용전교가 내려오자 3형제는 여러 날을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친에 이어 자신들까지 출사를 거부할 경우 멸문지화를 당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장남인 국무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관직에 나가지 않고 동생들만이 출사하기로했다. 두동생은 각각 예조참의와 헌납을 지냈다.

국무는 향리인 담양에서 널리 인재를 모아 사서삼경과 성리학을 전파함으로써 그 문하에서 호남의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국무는 비록 백두였음에도 당대의 고명한 유현으로 존경을 받았다. 국무는 부친 순절 후 일생동안 안방에 부친의 위패를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호곡했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지극한 효성에 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국무의 고려에 대한 충성심과 절개는 평생 변함이 없었고 당대 유현으로 또는 충절인으로서의 그의 명망은 조야에 널리 알려졌으며 충절의 귀감이라 불렀다. 담 양 학동에 묘소가 있으며 후손들이 향사를 모시고 있다.
1932년 국무의 후손인 국채웅이 개성에 표충사를 건립할 때 두문동 72현의 한 명인 국유의 배향을 위하여 거액을 희사하고 두문동의 옛 터의 부지 5000여 평을 구입하여 기부했다.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 

/정리=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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