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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담양성씨 인물사 ①
담양국씨(潭陽鞠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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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날짜 : 2012. 03.22. 13:38

2007년 경기도 파주시 통일전망대 건너편에 건립된 고려통일대전 담양국씨 선조 11명이 배향됨(고려34명 제왕과 351명의 충신 공신 절신 유현을 배향)

■ 추성군 국주(鞠周)
담양국씨 시조는 추성군 국주(秋城君 鞠周)다. 국주는 1101년 태어났으나 사망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다. 숙종6년부터 의종직위때까지로 보고 있다. 본래 중국 송(宋)나라 사람이었는데 고려에 귀화하여 추성군에 봉군됐다. 1101년생인 추성군은 출생 년도가 중국 연대로는 북송(北宋) 제8대 휘종 즉위한 해이고 고려 연대로는 제15대 숙종(肅宗) 6년이다.
추성군은 송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의 공경대부(公卿大夫)직을 맡았다. 1127년(고려 인종5년) 금(金)나라가 송나라의 서울인 개봉(開封)을 함락하고 송나라의 황제 휘종과 흠종을 잡아갔다. 이로써 북송은 멸망하고 만다. 이때 국주는 난을 피해 진기(秦起), 신소(辛昭), 남경(南景), 홍철(洪哲), 변구만(邊九萬)등과 바다를 건너 고려에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통지(通志)에 의하면 국주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있다. 통지는 송나라 정초(鄭樵)가 1161년 집필한 역사서다.
국씨는 희성(姬姓)으로 후직(后稷)의 손자다. 태어 날 때 손에 무늬가 있었다. 이 무늬가 국자(鞠字)와 같다하여 국(鞠)이라고 했다고한다. 후손인 국무(鞠武)는 연태자 단(燕太子丹)의 사부였다고 한다.
후직은 중국 전설의 농경신이며 주(周)왕조의 시조로 전해진다. 후직의 손자로 태어날 때 국자문양(鞠字紋樣:공모양)을 띤 사람은 사기(史記)에도 나온다. 뒤에 후손들이 국도(鞠陶)라고 이름 지었고, 국씨 성의 창시조이자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의 13대조이다. 연나라 태자 단은 자객 형가(荊軻)를 시켜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토록 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국도(鞠陶)의 먼 후손인 국주가 고려에 망명한 시기는 북송의 수도 개봉이 함락된 다음 해인 1128년이다. 이때가 제17대 인종 6년이다. 고려에 망명한 국주 일행은 인종을 찾아 뵙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자 인종은 국주에게 감정관(監正官)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국주가 망명할 당시 고려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이 왕위를 넘보며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지 채 2년이 안 된 때였다. 세상이 안정을 찾지못하고 뒤숭숭하자 풍수설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인종이 묘청 일파의 서경(西京:평양)천도론에 기울게 되면서 개경의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불신이 작용했다. 그때 마침 승려 묘청을 앞세운 서경 세력이 천도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서경 천도를 결심한 인종은 인종5년(1127)부터 서경에 대화궁을 짓기 시작하는 모든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묘청을 배척하는 김부식등 개경 세력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인종도 마침내 서경천도를 포기하고 말았다. 서경천도 계획이 백지로 돌아가자 인종 13년(1136) 정월 묘청을 비롯한 조광, 유참등 서경세력들이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정한뒤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이라 이름 붙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인종14년(1136)2월에 반란군은 김부식이 지휘하는 관군에의해 진압된다.
이처럼 인종 치하의 고려는 이자겸의 난과 뒤이은 묘청의 난으로 극심한 내우에 시달렸다. 또한 중국대륙에서의 커다란 정세변화는 외환을 심히 우려하는 상황이었다. 인종3년(1125년)에는 거란의 요가 여진의 금나라에게 망하고 금나라의 공격으로 남송이 항주에 세워졌다. 이로써 중국대륙 북방의 패권은 완전히 금나라가 장악하게되고 말았다.

당시 금나라 태종은 고려를 향해 군신관계에 의한 종속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인종은 국주를 금국 외교특사로 임명하면서 고려와 금나라는 군신관계가 아니고 대등관계를 유지하여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국주는 금나라에 가서 기고만장한 금나라 태종을 뵙고 자신은 송나라 사람으로 제곡의 원자인 후직의 자손이고 주무왕(周武王) 희발과 같은 집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고려와 금국은 군신관계가 아니고 대등관계로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야 된다고 역설하여 금나라 태종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무사히 돌아와 인종에게 이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국주의 보고를 받은 인종은 매우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국(鞠)은 국화(菊花)와 비슷하고 국화는 가을에 핀 꽂인즉 경(卿)을 훈일등공신 추성군(勳一等功臣 秋城君)에 봉하겠다."
이와 함께 담양(潭陽)을 식읍으로 내려 이후 담양을 본관으로 하는 담양 국씨가 비롯됐다. 식읍(食邑)은 조세를 공신이 거두어 쓰게하는 마을이다. 배위(부부가 다 죽었을 때 그 아내에 대한 경칭)는 영산신씨(靈山辛氏)이며 아들 지원(知遠)은 평장사를 지냈다. 묘소는 송도(松都:개성)에 있었으나 실전되어 담양 학동에 단비(壇碑)를 모시고 향사(제사)를 올리고 있다. 2007년 10월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

■ 평장사 국지원(鞠知遠)
본관은 담양이다. 제 18대 의종(毅宗)3년(1149)에 추성군 국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추성군 국주는 담양국씨의 시조로 북송이 멸망한 다음 해인 인종 6년(1128)에 중국에서 고려로 망명, 금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에서 큰 공을 세웠다.
국지원은 타고난 천성이 명민하고 용모가 수려하고 인품이 중후했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사서삼경에 능통했다. 22세 때인 의종24년(1170)에 출사하여 여러 부서를 거쳤다. 근면 성실해 나라 일을 잘 처리하고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등 인망이 높았다.
국지원이 조정에 출사하던 해는 정중부등에 의한 무신 정변이 일어난 역사적인 해였다. 의종은 사치와 방종을 일삼고 편당에 휩쓸려 정치가 어지럽기 이를 데 없었다. 또한 멸망 전의 북송의 경우처럼 문관을 높이고 무관을 낮추어 보는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폐풍이 극에 달했다.
무장들은 또 늘상 문관들로부터 무식하다고 무시를 당했으며 심지어 환관들로 부터도 그런 수모를 겪여야 했다.

술자리가 펼쳐지면 정중부를 비롯한 무인과 병사들이 주변을 지켜야 했다. 주연이 길어지면 그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곤했다. 그럴때 마다 의종은 무장들을 달래기 위해 택견등과 같은 무예 시합을 시켜 우승한 사람에게 상을 내리곤 했다.
의종21년(1167) 연등회 도중 우승선으로 있던 김부식의 둘째아들 김돈중이 거느린 기마병의 화살통이 무엇엔가 들이 받혔는데 공교롭게도 그 화살이 왕의 보련(윗덮게가 없는 왕이 타는 가마)옆에 터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의종은 이를 자기를 시해하기 위한 것으로 오해해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고 마침내 무고한 호위병 14명이 귀양가는 사태로 까지 번졌다.무인들의 불만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의종은 여전히 3일에 한 번씩 연회를 베풀어 호위 무장과 병사들의 고초를 가중시켰다. 결국 이는 군사반란을 불어일으키고야 말았다.

의종24년(1170)8월 정축일 밤에 의종이 문관들과 밤늦도록 연회를 즐기자 정중부․이의방․이고등이 반역을 획책하고 그 다음날 왕이 보현원으로 가면 거사를 치르기로 결의 했다. 다음날 의종이 무관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게했다. 오병 수박희는 다섯명이 어울려 하는 일종의 씨름이었다. 늙은 장수들과 젊은 문인들이 맞붙었다. 그런데 대장군 이소응이 지고 말았다. 이에 기거주(起居注)로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정중부를 비롯한 무관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 경박한 행동이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의종이 나서 정중부를 달래며 진정시키려했으나 이날 저녁 무렵에 왕이 보현원에 이르렀을 때 이과와 이의방이 왕의 총신 임종식, 이복기등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은 곧 의종 앞에서 한뢰를 죽이고 그 연회에 참석했던 대소 신료들과 환관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렇게 발발한 무신정변에 의해 고려 조정은 무신들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그 후 일백년간 무신집권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러한 국정의 혼란 속에서도 국지원은 오로지 몸이 수척해질 정도로 충성을 다하였으며 그 결과 크게 대성하여 마침내 정2품 문하시랑 평장사에까지 오르다.
묘소는 송도에 있었으나 실전되고 현재는 담양 학동에 단비를 세워 시향(時享)하고있다. 그의 아들 영돈(暎敦)은 문하찬성사를 지냈으며 2007년 10월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 대전에 배향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담양신문은 208호부터 담양이 본관인 인물사를 연재합니다. 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질 성씨 탐방은 시조부터 근 현대와 현존하는 인물까지 두루 다룰 계획입니다. 담양의 성씨는 담양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담양의 역사를 탐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분야입니다. 그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담양의 과거를 되돌아 보고 미래의 발전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담양 성씨 재조명은 의미있는 작업이라 여겨집니다. 담양군민의 협력과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담양성씨와 관련된 자료가 필요합니다. 성씨별로 각종 자료를 보내주면 참고한 후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대동보를 비롯 각종 책자와 유인물, 사진자료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