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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담양성씨 인물사②
담양국씨(潭陽鞠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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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날짜 : 2012. 03.22. 13:29

■ 찬성사 국영돈(贊成事 鞠暎敦)-1184~?, 명종 14년~고종 연간

주목할 만한 업적은 팔만대장경 판각 조판사업 감독직인 군부총랑에 올라 팔만대장경을 완성하고 승진을 거듭,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제19대 명종 14년(1184)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朗 平章事)를 지낸 국지원(鞠知遠)의 아들이다. 담양국씨의 시조 추성군 국주의 손자다. 천성이 영매(英邁)하고 중후하여 문명(文明)이 높았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주요 관직을 거쳐 군부총랑(軍簿摠朗)에 올랐다. 군부총랑으로서 특히 주목할 만한 업적은 팔만대장경 판각 사업을 관장한 것이다.
당시는 무신의 집권 기간으로 최씨의 무단통치가 계속되고 있던 때였다. 대륙에서는 몽골이 일어나 고려를 7차례에 걸쳐 침입했다. 고려에서는 해전에 취약한 몽골에 대해 장기 항전 전략을 세워 강화도로 천도해 대몽항전에 들어갔다. 강화도 천도시절 조정에서는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군을 격퇴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 팔만대장경 조판 사업을 시작했다.
제8대 현종2년(1011)에 거란족이 침입하자 민심을 단결시키기위해 대장경을 판각하였다. 흔히 초조(初雕 : 처음 판각한 것)대장경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북송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달성한 문화 업적이다.

초조대장경과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완성된 속장경(續藏經)은 부인사에 보관했다. 그런데 고종19년(1232) 몽골군의 2차 침입으로 부인사가 불타는 바람에 이 양대 대장경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최고 집권자 최우는 고종23년(1236)에 대장도감을 설치케하고 대장경을 판각하는 대역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판각을 준비기간을 포함 16년에 걸쳐 완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팔만대장경이다. 팔만대장경의 판각목적은 초조대장경 판각과 마찬가지로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는데 목적이 있었다. 단순히 신앙적 의미가 아니라 대장경 판각 사업을 통해 모든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으려는 일종의 정신적 교화 정책이라 할수 있다.

판각사업은 최이의 후원과 개타사의 승통(僧統) 수기(守其)의 교정을 바탕으로 강화도의 대장도감과 남해와 강화의 분사대장도감에서 이루어졌다. 대장경판은 성격상 정장과 부장으로 구성된다. 정장은 대장목록에 수록되어있는 경(經 )으로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1497종 6558권의 경전을 말한다. 부장은 대장목록에 수록되지 못한 존경록등의 4종 150권을 일컫는다. 그 후 대장경판은 강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줄곧 수장 되었다가 충숙왕 3년(1318) 강화 선원사로 옮겨졌고 조선 조 태조 6년(1397)5월에 해인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있다.
국영돈은 이렇게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 고려 팔만대장경 조판 사업을 당시 군부총랑으로서 조판감독관에 임명되어 완성한 것이다. 고종38년(1251)에 조판이 완료될 때 까지 밤낮을 가리지않고 전력을 쏟아 성취될 수 있었던 대 역사였다. 국영돈은 그 후 승진에 승진을 거듭,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아들 성윤(成允)은 충청 안렴사를 지냈다.묘소는 실전되어 담양 학동에 단비를 모시고 세향을 올리고있다. 2007년 10월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

■ 안렴사 국성윤(按廉使 鞠成允)-1214~?, 고종 1년~충렬왕 연간

충성을 다해 노력한 결과 충청 안렴사에 보임되었다. 왕이 관내를 순시할 때 전쟁으로 볏단이 불에 타버린 화전민을 찾아가 대가를 보상해주니,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다.

제23대 고종 원년(1214)에 찬성사 국영돈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하시랑평장사 국지원이 조부이며 담양국씨의 시조 추성군 국주가 증조다.
국성윤은 약관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는 가운데 괄목할 만한 선정을 베풀었다. 이때는 최충헌, 최우(후에 최이로 개명), 최항 그리고 최의로 이어지는 최씨 일족의 무단정치가 계속되고있던 시기다.

중국 북방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몽골은 고려에 강화를 요청하여왔고 고려의 조정은 숙고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몽골과 고려는 소강상태를 이루며 일시 형제의 관계를 유지하게되었다. 국성윤이 여섯 살 때인 고종6년(1219)에 실권자인 최충헌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이가 실권을 장악하게됐다. 한편 형제의 맹약을 맺어 평화를 유지해 오던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을 계기로 악화되었다. 몽골은 보복을 선언하고 고종18년(1231)8월에 살리타이의 지휘 아래 압록강을 건너 내침을 강행했다. 이는 28년 동안 무려 7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자행된 고려 침략의 서막이었다. 고려도 몽골군의 침입에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각지의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이주시키며 항전했다. 몽골은 제5차 침입 이후 계속해서 고려왕의 출륙을 요청하였으나 불응하자 고종 44년(1257)제 6.7차의 침입을 단행했다.
그동안 국왕의 친조를 요구하던 몽골은 수위를 낮추어 태자의 입조로 대신할 것을 제의했고 이에 따라 양국간의 강화가 성립되는 듯 했다. 하지만 고려에서 태자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며 안경공 창을 대신 보내자 몽골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고종45년(1258)4월에 류경 김인준등에 의해 최의가 피살됨으로서 그동안 몽골에 대향하여 강경자세를 취하던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다. 이에따라 그해 2월에 고려 조정은 박희실과 조문주를 몽골에 보내 최의의 죽음을 알리고 출륙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약속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화의가 성립되어 30여년 동안 지속되던 여몽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국성윤은 충성을 다해 노력한 결과 충청 안렴사에 보임되었다. 충렬왕 2년(1276)에 왕이 관내를 순시할 때 전쟁으로 볏단이 불에 타버린 화전민을 찾아가서 그 대가를 보상해주니,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아들 호(虎)는 평장사를, 손자 건은 정당문학을 지냈다. 묘소는 송경(개경)에 있었으나 실전되어 현재 담양 학동에 단비를 모시고 제향을 드리고있다.
2007년10월 경기도파주시 고려통일 대전에 배향되었다.

■ 평장사 국호(平章事 鞠虎)-1235~, 고종 22년 ~충렬왕 연간

원나라 일본정복 야욕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국호는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건의를 끊임없이 올렸다. 마침내 그 능력을 인정받아 문하평장사의 영광을 안았다.

제23대 고종 22년(1235)에 충청 안렴사 국성윤의 아들이다. 조부는 찬성사 국영돈, 증조는 평장사 국지원이며 담양국씨의 시조 추성군 국주의 현손이다.
국호는 대대로 고관직을 이어온 명망 높은 가문의 집안에 태어나 충효의 엄한 훈육 속에서 성장했다. 약관에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당시는 몽골의 지배를 받고있었던 때라 조정과 백성 모두가 괴롭고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원나라 황실의 부마가 된 충렬왕은 원나라의 압력에 못 이겨 즉위 4개월만인(1274)10월에 일본 정벌 전쟁에 참여했다. 그동안 고려를 통하여 일본의 조공을 요구하던 원나라는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않자 무력으로 일본을 정벌하여 세력을 과시하려 했고 이를 달성하기 이해 고려군을 동원 했던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한 몽골군이지만 수전(水戰)에서 맥을 못 추었다.

일본정벌을 위하여 충렬왕은 김방경, 임개, 손세정등에게 군사 8000명을 내주었다. 원나라는 도원수 홀돈,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등이 이끄는 몽골군과 한족 2만5000명을 동원했다. 여기에 뱃길 안내자 및 수군6700명이 가세했다. 총 4만 군사가 900여 척의 함선에 나누어 타고 일본 정벌 길에 올랐다. 그러나 태풍으로 일본 본토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야했다.

원나라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다시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충렬왕 7년(1281)에는 15만의 연합군을 동원하여 두 번째로 일본으로 출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전처럼 태풍으로 본토 공략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원의 세조는 지속적으로 고려 조정에 일본 정벌을 강요, 피해가 컸다.

국호는 이와중에서 충성을 다하였으며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건의를 끊임없이 올렸다. 마침내 그 능력을 인정받아 문하평장사에 올랐다. 이와같은 그의 공훈이 송도(개경)의 대종경(大鐘磬)에 양각되기도 했다. 사후에는 왕명으로 사패지(賜牌地 : 임금이 내려 준 땅이라는 뜻)가 내려졌고 장례는 국가의 예장으로 치러졌다.

묘소는 현재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마강가의 오수리에 있다. 700여년 전의 묘제를 유지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곳은 부여 일대에서 유명한 명당자리로 소문이 나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조부를 투장(偸葬)하려고 묘를 팠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고 청천 병력을 내려 혼비백산 도망을 쳤다고 전해온다. 이는 큰 인물의 묘소는 혼백 자체가 흩어지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매년 봄에 시향을 모시고있다.
파주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
현재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마강가의 오수리 산8번지에 있는 국호 묘소. 700여년 전의 묘제를 유지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묘비는 2007년3월13일 다시 세웠다. 이곳은 부여 일대에서 유명한 명당자리로 소문이 나있다.